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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1세,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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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둡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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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장 잘 아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연기한 클레오파트라는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 

 

1963년 개봉한 초대형 사극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리즈 테일러가 주인공을 맡았는데, 세기의 미녀 배우가 펼친 뛰어난 연기력과 관능적인 외모로 클레오파트라 연기에 전 세계 대중을 사로잡았다. 재색겸비의 인물답게, 로마군이 도서관을 태워 먹자 야만인들이라고 빡쳐 하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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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소테르(그리스어: Πτολεμαῖος Σωτήρ) 기원전 367년 ~ 기원전 283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을 분할통치한 디아도코이의 한 사람이자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파라오이다.

 

(반면,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는 AD 100년경의 학자이다)

 

가계 전설에 의하면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어머니는 아르시노에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기록되지 않아서, 일설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라는 이야기도 있다. 즉, 알렉산드로스와 이복형제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을 나눠가진 디아도코이 중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바빌론에서 그리스로 운반되던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탈취하여 자기의 영역인 이집트로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를 신격화하며 떠받들었고, 프톨레마이오스 본인이 알렉산드로스 원정에 대한 긴 회고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회고록은 나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기독교도 혹은 이슬람교도에게 불살라졌을 때, 없어졌다고 추정되지만, 로마시대의 역사가들이 이 회고록을 보고 역사서를 편찬했기 때문에 대강의 내용은 현재까지 알려져 있다.)

 

당대에는 그의 아버지가 마케도니아의 귀족인 라고스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나 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형제가 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어린 시절부터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교육받았고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해졌다.

 

알렉산더보다 10살 연상이었지만, 함께 동문수학하면서 충성스런 부하이자 절친한 친구로서 알렉산더의 첫번 원정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원정길을 동행하였다.

 

바빌로니아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가 후사를 명시하지 않고 급사하자[2],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은 협의 끝에 그가 남긴 제국을 분할통치하기로 결정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리비아를 차지했는데, 그리스로 운송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탈취하여 자기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그가 알렉산드로스의 관을 멤피스로 옮겨 석관에 안치하면서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났는데, 페르디카스가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에 군사를 이끌고 갔지만, 강을 도하하려다 실패한 일로 인해 휘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쇠했던 그는 기원전 285년부터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공동으로 통치했고, 기원전 28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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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5대 파라오. 왕조 역사상 최초의 시리아 출신 파라오이다.

 

기원전 204년경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와 라오디케 3세의 딸로 출생했다. 기원전 193년 초, 10세의 나이로 16세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 결혼을 통해 이집트를 복종시켜서 다시는 셀레우코스 왕조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는 일전에 패배한 장소인 라피아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해, 전 세계에 자신의 위용을 과시했다.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측은 클레오파트라 1세가 지참금으로 코엘레-시리아를 이집트에 넘겨줄 예정이었으나 이행되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클레오파트라 1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파라오였기에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시리아 출신인 점을 감안하여 '쉬라(Σύρα: 시리아인)'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녀는 남편과 동등한 존재로서 신격화되었고, 남편의 승인하에 수많은 존칭을 받았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의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6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2세를 낳았다.

 

기원전 180년 9월, 시리아를 침공하려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갑자기 죽었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즉시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파라오로 세우고,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공동 파라오 지위까지 자신이 섭정하여 실권자가 되었다. 남편이 추진하던 시리아 정벌 계획을 취소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우호 관계를 이어갔으며, 시리아 출신 노예로 자신이 결혼 후 이집트로 갔을 때 수행원이었던 레네오스를 요직에 앉히는 등 시리아 출신 인사들을 중용했다. 이 조치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궁정은 시리아 출신 소수 관료가 권력을 독차지하고, 나머지 관료들은 소외감을 느끼는 위험한 구도가 조성되었다. 다만 그녀 생전엔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 시절의 혼란스러웠던 내정이 회복되었다.

기원전 176년경, 클레오파트라 1세가 붕어했다. 그녀는 환관이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가정교사인 에우라이오스와 레네오스를 섭정으로 세운다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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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클레오파트라 7세

 

고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실질적 마지막 군주이자, 사실상 마지막 파라오다.[2][3]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 또한 고대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파라오'로 즉위한 마지막 인물이다. 이 인물을 끝으로 '독립 국가 이집트의 군주'로서의 파라오는 완전히 명맥이 끊긴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이집트에선 파라오의 칭호를 사용하고 이집트의 파라오식 즉위 행사를 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였으며, 이마저도 훗날 기독교의 확산에 따라 중단되었다. 또한 로마 제국 이후 이집트를 다스린 군주들은 파라오 칭호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에서 남자 통치자들은 전부 프톨레마이오스란 이름을 썼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케, 아르시노에라는 이름을 돌려썼다. 그러다보니 당대에는 이름 뒤에 붙이는 별칭으로 구분하기도 했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별칭 '테아 네오테라'는 '새로운 여신'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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