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사를 창건하고, 천태종을 중창하신 상월원각대조사님을 알아봅니다. 구인사 인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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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천태종
大韓佛敎天台宗 | Cheontae Order of Korean Buddhism
개인완성(個人完成)
불국토건설(佛國土建設)
법성체결합(法性體結合)
통상적으로 1911년생이라고 하는데, 최동순 교수가 고증한 바에 따르면 1922년생이다. 밀양 박씨 집안으로 강원도 삼척시에서 태어났다. 속명도 교단에서는 박준동(朴準東)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종교학자가 고증한 바에 따르면 박준각(朴準角)이다. 법명이 상월(上月)이고 법호가 원각(圓覺)이다.
여러 부처들과 더불어 천태종의 역대조사들도 모신다는 게 차이점. 그래서 경내에 불전보다는 강당과 요사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상 나무위키 천태종 편 발췌
실상(實相)은 무상(無相)이고
묘법(妙法)은 무생(無生)이며
연화(蓮華)는 무염(無染)이다.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
무생(無生)에 안주(安住)하여
무염(無染)으로 생활하면
그것이 곧 무상보리(無上菩提)요
무애해탈(無碍解脫)이며
무한생명(無限生命)의 자체구현(自體具現)이다.
일심(一心)이 상(常) 청정(淸淨)하면
처처(處處)에 연화(蓮華) 개(開)니라.
상월원각대조사 법어
법호가 원각(圓覺)이다. 불교계에서는 보통은 법호를 앞에, 법명을 뒤에 넣어 호칭하므로 '원각 상월'이어야 자연스럽지만 천태종에서는 '상월 원각'이라고 부른다.
500년간 맥이 끊겨진 한국 천태종을 중창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3대지표인 애국불교ㆍ생활불교ㆍ대중불교를 전개해 중생의 구제를 실천하였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참선 수행을 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종풍을 세웠다. 교리는 천태종의 법맥을 이었으나 주경야선 수행을 통하여 나 자신을 닦아가는 수행으로써의 역할을 더욱 중요시했다.
1947년(24세)에 '오 선생'이라는 사람이 상마읍리에 찾아왔다. 이른바 '도인'이라고 불리는 부류였는데, 주문을 외우고 흙을 발라주며 기치료를 하여 환자를 낫우는 힘이 있다고 하여 오 선생을 찾아 인근의 병자들이 찾아왔다. 이 모습은 상월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루는 상월이 오 선생에게 어떻게 하면 자기도 당신처럼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오 선생은 "도를 닦으라." 하면서, "천수경을 줄 테니 먼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암기하고, 그 다음에는 천수경 전체를 큰 소리로 읽어라."라고 알려주었다.
상월은 고향 뒷산 삼태산(三台山)과 두리봉 근처 움푹 파인 지형을 찾아들어갔다. 과거 마을의 반체 훈장 노릇을 하던 이들이 도인 수련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상월은 그 자리에서 움막을 지어놓고 수도하다가, 근처에 쓰러진 나무에 앉아 수도하였다. 그 나무는 소(沼) 위에 걸쳐져 있어, 그 위에 앉아 다라니를 외우다가 졸면 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칼을 챙겨 졸면 몸을 찌르기도 하고, 여치가 손가락을 깨무는데도 참고 넘어갔다고 한다.[9] 여치에게 물린 흉터는 평생 남았다.
상월은 좁쌀과 고추장을 챙겨갔으나, 점차 먹는 양을 줄이며 수도하였다. 처음엔 하루에 한 끼였다가 이틀에 한 끼, 사흘에 한 끼... 이렇게 용맹정진한 결과 축지법이나 차력술 같은 기묘한 신통력을 얻었다고 한다.
6월 초에 입산하여 백일기도를 마치고 9월에 내려와보니 마을에 오 선생이 없었다. 오 선생이 마을의 노부인 한 명을 치료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죽게 한 탓이었다. 한여름에 열병이 닥치자 오 선생이 부인을 살리겠다고 예의 황토를 몸에 바르고 주문을 외우며 이불을 덮었는데 그대로 노부인이 숨을 거두었다. 아들들이 분노하여 오 선생을 때려 죽일 기세가 되었으므로, 상월이 내려오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도피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오 선생을 만나지는 못했으나, 상월은 자신이 오 선생보다 더 높은 경지에 들었다고 확신했으므로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 또한 같이 입산한 다른 친구들도 먼저 내려와 있었는데, 그들은 입산한 지 얼마 안 되어 포기하고 내려왔다고 하였다.
이후 상월은 본가에 머무르면서 ≪정감록≫ 등 비결서와 불경을 읽었고, ≪정감록≫에 나오는 이른바 십승지들도 찾아다녔다. 또한 고향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인들과 교류하였는데, 이 와중에 다시 오 선생과 만나 축지법도 배웠다고 한다. 이후 상월은 꾸준히 오 선생과 소식을 주고 받았다.
1951년(28세) 단옷날 연화지에 초가집을 몇 채 지어 구인사를 창건했다. 물론 건물들은 그 전부터 지었지만 단오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고 보고 창건기념일로 삼았다. 구인사에서는 지금도 단오를 특별히 보낸다.
...
51년인지 56년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구인사에서 수도하던 50년대의 어느 날 새벽 3시, 상월은 갑자기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라고 외치며 일어서더니 벼락 같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를 보라. 동천에 큰 별이 나타나서 내 입으로 들어오니 뱃속이 환하게 밝고, 일월이 머리 위에 있으니 천지가 크게 밝도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내가 탄생했다.”
구인사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대략 1960년 즈음부터인 듯하다. 67년 언론보도[17]에서는 보도 시점에서 7년 전(1960년)부터 구인사에 '인삼주'라고 불리는 약수가 좋다고 소문이 나, 강원도나 경북 일대에서 정신병환자나 중풍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설명했다.[18] 기사에서는 "절이라기보다 요양소가 된 구인사와 박씨."라고 설명하고, 상월을 카리스마적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사회봉사에 헌신하는 사람에 가깝게 묘사했다. 아마도 60년대 구인사는 병자들을 위한 요양소에 가까웠고, 상월과 추종자들이 낮에는 약초를 재배하여 요양소를 지었으며, 밤에는 환자들과 별개로 주술적인/종교적인 수련을 행한 듯하다. 이러는 와중에 점차 불교 신자들도 모여들어 천태종이라는 종단을 시작할 여력이 생겼을 것이다.
1966년(43세) 8월 30일, 구인사를 창건한 지 15년 만에 상월은 대한불교천태종이라는 종단을 중창[20]하기로 결심하고, 회삼귀일(會三歸一)ㆍ삼제삼관(三諦三觀) 등 종지를 계승하여 종헌과 종법을 마련하여 문교부에 신청하였다. 이듬해 67년(44세) 1월 24일에는 허가를 받긴 했는데, 당시에는 정부가 조계종 이외의 불교종단을 따로 인정하지 않아서 '천태종대각불교포교원(天台宗大覺佛敎布敎院)'이란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여기서 대각(大覺)이란 단어는 11세기 고려 승려로 해동 천태종을 창종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에서 땄다.
구인사 대조사전에서 수리봉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죽령으로부터 구인사까지 소백산을 종주하는 길목[29]이기 때문에 구인사 신도뿐만 아니라 숱한 등산객들이 그 길을 오간다.
연화봉 일출이 빛난 소백산 죽구종주, "2021. 5. 23." (tistory.com)

④상월대조사의 신이(神異)세계-대조사의 신이 행적을 중심으로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금강신문 (ggbn.co.kr)

인광당은 불기 2531(1987)년 4월 낙성한 5층 건물로서 승려 및 신도의 교육을 위한 시설과 대강당, 신도 기도실 및 도서실 등의 다용도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인광당 옆 장문당실에는 감사원과 종의회 사무실이 들어서 있고 4,5층은 구인사를 방문한 귀빈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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