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프로젝트 오펜하이머 핵폭탄 최초의핵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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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펜하이머 박사는 과학윤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이론물리학자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뉴멕시코주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이론적 주도자 역할을 했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19세기 말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 직물업자였다. 하버드대 화학과를 최우등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대에서 23살 때 이론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지도교수인 막스 보른(1882~1970년)은 유대인으로 30년대 나치가 집권하면서 프랑크푸르트대 교수에서 쫓겨나자 영국에 망명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 교수로 일하다 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새 조국인 영국에 안겨줬다. 가수와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올리비아 뉴튼존의 외할아버지다.

트리니티 실험에 사용될 핵무기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원자폭탄으로, 가젯 코드명이 붙여졌다. 기밀 누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너무 기괴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플루토늄 핵폭탄은 정확한 타이밍에 동시에 폭발하여 그 압력으로 중앙의 플루토늄을 강하게 압축시켜야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 있고, 타이밍이 정확한 기폭시키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설계의 결과로 가젯의 표면은어지럽게 얽혀있는 기묘한 쇠공 같은 모습이 되었다.

1945-7-16 트리니티 실험

한낮의 태양보다는 몇 배는 더 큰 강도의 빛이 사방에
눈이 완전히 멀어버렸고 30초가 지나야
왜 일본에 두발이나 쐈는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평화로운 휴일을 무참히 깬 일본의 전투기들은 350대의 비행기에서 약 수천발의 폭탄을 일본군은 투하했다.
미국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2천명이상 사망, 20척 함선파괴, 300대 이상 비행기 파괴
이동식레이더를 사용하려고 다뤄보라는 명령을 처음 내렸었는데
최신식 라에디어 포착된 수상한 낌새가 있었다.
당환한 훈련병은 레이더에 비행기들이 잡힙니다. 몇대인지 모를 정도로 많다는 보고를 올렸다.
본토에서 오기로 한 비행기 아니랴라고 착각을 했었다.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하와이이기때문, 일본에서 약 6300km의 거리였기 때문에 의심을 하지 못했다.
일본도 성공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종합 국력이 일본을 1로 잡았을때 미국은 12였다.
군사력은 미국이 30배가 높았다.
그런데 왜 일본은 무모하게 공격을 했는가?
당시 태평양에서 세력을 확장하려했는데, 미국은 일본 젝국의 대미자산을 동결했다.
일본은 금수조치를 해제하기 위해서는 물러나야만 했다.
석유의 약 80%를 ㅁ미국에서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선제 타격이 필요했다.
미국의 기세를 꺾어버리자라는 작전이었다.
다음 목표는 동남아였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미얀마를 침공하고 유전을 확보했다.
그동안 미국은 가만히 있었나?
하와이에 있던 태평양 함대가 궤멸했기 때문에, 6개월 동안 무주공산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 미국 공격을 한번 더 할까? 생각을 해서 미드웨이 해전을 감행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미국의 항공모함을 전부 파괴하겠다는 목표였다.
그러나 복수의 칼날을 미국에 의해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잃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미일전쟁의 판도는 뒤집어졌다.
이후 미국은 마샬 길버트 마리아나 군도를 차례차례 점령해간다.
항복을 수치로 생각한 일본은 항복을 하지 않았다.
1억옥쇄작전을 감행했다. 인간을 폭탄으로 사용하는 가미카제(카미카제)를 단행했다.
신풍=신의바람=가미카제
고려시대로 가보면, ㅇ여몽연합군이 있었다.
일본에 이르러서 승전을 거듭했지만 여몽연합군은 결국에는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입장에서는 고마움 바람이 불어줘서 도움을 받은 것인데,
태풍이 불어줘서 여몽연합군은 일본 정벌에서 후퇴했었다.
이걸 본 일본인들이 신풍, 카미카제를 명명한 것이다.
신이 불어준 바람으로 폭탄을 싣고 날아가 항공모함을 격파하겠다.
미국 자국민의 희생 및 카미카제같은 비윤리적인 소모전쟁을 막기위해
일본폭격을 결정을 했는데, 이것도 아이러니다.
도쿄는 당시 밤이었는데, 한낮보다 밝았다고 한다. 소이탄의 결과이다.
사람은 30%만 손실되어도 전투 기능이 상실되는데 일본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리틀보이가 등장했다.
에놀라게이가 싣고 티니언섬에서부터 출발했다.
왜 파힐 히로시마였나?
히로시마는 폭격으로부터 일단 무사한 도시였다.
조선소 배행장 항공기부품,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였다.
일본은 미리 알았을까? 히로시마 레이더 관측소에서 일본 상공 진입을 한 것을 알았다.
그런데 공습경보를 해제했다.
그 이유는, 비행기가 많이 않아서였다.
대공습 이후에 수백대가 나타났다가
핵폭격에 참여한 비행기는 4대였기 때문이었다.


조금전 미합중국의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파괴의 비가 하늘에서 내릴 것입니다.
우리는 공격을 이어갈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공격기술로 말입니다.
일본의 반응은 어떠했나?
살려달라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게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하지 않는다.
모든 결정권을 가진 일왕은 45년 2월에 고오에 후미마로가 항복하자고 건의를 했지만
지금은 불리하다, 대세가 조금이라도 뒤집혔을때 하라고 하는데, 누구도 거역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또 움직인다.
히로시마 3일만에, 핵폭탄 팻맨을 두번째로 준비한다.

리틀보이보다 더 뚱뚱하고 강력한 폭탄인 것이다.
나가사키 600미터에서 폭팔, 조준점에서 4km가 벗어났지만 3만여명이 사망했다.
일본은 또다시 지옥을 경험한다.
하늘에서 검은비가 내리는데, 엄청난 갈증으로 그걸 마시고
냄새도 맛도 없는 방사능의 존재를 그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두 도시가 지옥으로 변하자
공식적으로 일본은 항복을 하게 된다.
히로히토 일왕은 8/15 항복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는다.
미국국민들은 당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과연 그래야만 했을까 라는 생각을 , 피폭자들의 경험을 듣게 되면서 윤리에 대한 말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도덕적으로 해야만 했나? 스팀스 당시 전쟁장관 소련과으 ㅣ관계 대립을 예상했기 때문에
합리적인 평가도 함께 있었다.
핵폭탄의 공격이후 미국은 핵폭탄을 사용하지 않기로 장담했다.
일본은 핵폭탄 공격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은 나라지만
두번째 피해는 한국이다.
전세계가 잘 모르고 있지만, 당시 한국인 사망자는 4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피해자는 7만여명에 다다른다.
히로시마가 산업도시인데,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고, 조선인들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가사키도 마찬가지 였다.
또 다른 이유로 더 많은 피해자가 양산되었다.
방사능 처리에 한국인들이 투여되었기 때문이다.
보호장비 없이 강제 노역 도시청소로 인한 피폭자 수가 많아졌다.


끝나지 않은 우리나라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이 열였다.
중미영 수장이 만나서 조선의 독립을 처음 언급하게 되었다.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에 45년 2월 회담이 열린다.
영미소 수장이 모여 얄타회담을 갖게 되었다.
지친 소련군은 다급히 독일에게 참전한다.
대일전에 참전한 소련이 함경도 땅에 발을 막 내딛으려는 순간
미국은 소련에 긴급제안을 한다.
그게 38도선 분할 통치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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