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과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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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 사라진 '북한산성 행궁'을 찾아서 | 서울시 - 내 손안에 서울 (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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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을 수축한 숙종은 산성 내에 행궁을 설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행궁이 완성되었음은 1712년(숙종 38) 6월 9일 “북한산성의 행궁의 영건당상(營建堂上) 이하를 모두 써서 들이라고 명하고 상을 내렸는데 차등이 있었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앞서 1710년 10월 민진후는 “대개 북한산에 성을 쌓는 계책은 드는 비용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행궁(行宮)과 창고를 반드시 아울러 설치하여야 합니다.”라는 논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2> 산성 (사진첨부) > 새소식 > 열린마당 : 서울 한양도성 (seoul.go.kr)
1751년에 나온 영조의 ‘수성윤음’(守城綸音)은 봉건 전제군주의 폭탄선언이었다. 이제는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도성수성론’(都城守城論)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본격 거론된 것이다. 인조가 1637년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한 지 114년 만이고, 고종이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기 145년 전의 일이다. 사실 도성과 도성민은 방어의 대상이 아니었다. 외적이 침입해 도성에 접근하면 왕은 신속하게 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왜군은 부산상륙 18일 만에,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5일 만에 한양도성을 손에 넣었다.
유사시 왕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별도의 보장처(피신장소)를 여러 곳에 마련해 두는 것을 동양 병법의 전통으로 여겼다. 보호해야 할 대상은 오직 왕뿐이었다. 개성, 강화, 화성, 광주 등 4곳에 유수부(留守府)를 두어 중앙관서로 삼았다. 왕이 도성 밖 행차할 때 머물던 행궁이자 피신처였다. 이 중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강화도, 수원 화성과 더불어 외침에 대비한 농성 장소였다.

남한산성은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둘레 11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하고 있는데 인조2년(1624)~4년(1626)에 쌓은 남한산성 본성에는 동·서·남·북 모두 4곳의 성문이 있어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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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작성일 2023.06.26 1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