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안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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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 bc82~30
안토니우스의 할아버지는 술라 파에 가담했다가 뒤에 마리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유명한 웅변가였다.
청년 때 잘생긴 안토니우스는 쿠리오의 보증으로 250달란트의 빚을 지게 되었다.
쿠리오의 아버지 덕에 우정에 문제가 생긴 안토니우스는 한동안 폭력을 일삼는 클로디우스 일파와 어울려 다니다 염증을 느껴 그리소로가 웅변술과 무술을 배웠다.
어느날 집정관을 지낸 가비니우스가 안토니우스에게 시리아 정벌의 동참을 요청하고 이에 응해 안토니우스는 따라나가 적군을 격파하였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싸울 때 안토니우스는 잇달아 뛰어난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독재관으로 선출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기 위해 떠나면서 안토니우스를 로마에 보내어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웠는데,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가서 날마다 술과 부녀자들과 어울렸다.
카이사르는 이에 실맹하고 세번째 집정관이 되었을 때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레피두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선택했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방종상 생활을 버리고 클로디우스의 미망인인 풀비아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생활태도가 달라졌다.. 이에 아프리카 스페인 정복을 마친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중요한 자리에 앉혔으나,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안토니우스는 교묘한 추도 연설로 사람들을 선동에 거사해 성공한 브루투스 일당을 로마에서 몰아냈다.
그러자 카이사르 파는 모두 안토니우스 휘하로 모여들었다.
카이사르의 부인 칼푸르니아 또한 재산 대부분을 안토니우스에게 맡겼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조카이며 상속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아폴로니아에서 돌아와 카이사르의 유산을 요구했다.
아폴로니아는 현재 알바니아에 있는, 과거 그리스의 도시인데
어느 문서에는 현재 크로아티아 위치라고도 해서 잘 모르겠다.

이래 그림 리비아에도 아폴로니아가 있다.

이후 지속적으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경쟁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 의원을 부추겨 안토니우스는 로마으 ㅣ적이니 추방해야 한다고 하자,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출동 옥타비아누스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만다.
안토니우스는 레피두스 장군을 점령해 지휘권을 배았았지만 레피두스를 극진히 대우하며 이탈리아로 ㄷ돌아왔다.
키케로와 멀어진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와 셋이 비밀 회담을 하게 된다.
삼두정치를 하기로 결정한 그들은 결혼 동맹을 맺는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딸 클로디아를 아내로 맞게 된다.
300명을 삼두정치에 반한다고 처형하고 키케로도 암살하고 만다.
한편 그리스에서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힘을 기르고 있었다.
이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로 쳐들어가서 그들의 군대를 쳐부순다. 병으로 후송된 옥타비아누스 대신, 안토니우스가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하였고, 여러 도시를 정복하면서 세력을 넓혀 갔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를 보자마자 완전히 매료되었고, 아내 풀비아가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싸우고 있었음에도 알렉산드리아로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했다.
이후 아내 풀비아가 이탈리아에서 쫓겨났고, 시리아 리디아 이오니아를 파르티아가 종백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정신을 차리고 페니키아까지 진군했다. 이때 어서 로마로 돌아오라는 풀비아의 편지를 받고, 200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로마로 향했다.
이탈리아로부터 도망쳐온 친구에게 "전쟁이 일어난 원인은 풀비아에게 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와 전쟁을 벌이면 자네가 클로에파트라를 버리고 로마로 달여올거라 생각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로마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화해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는 결혼을 하고 결속력을 다지게 된다.
점쟁이 말을 듣고 아테네로 간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하게 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와의 갈등을 옥타비아가 중재했고, 안토니우스는 시리아로 향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다시 재회한 후 시리아와의 패전에서 도망친 후에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지내게 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전쟁 준비를 마치고 원로원을 소집해 클레오파트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클로에파트라와 함께 800척의 대함대를 편성한 뒤 아테네로 향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옥타비아를 집에서 내쫗아 로마사람들은 더욱 치를 떨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시간을 끄는 동안 서둘러 전쟁 준비를 마쳤다.
선전포고를 받은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로 진격 명령을 내렸다.
안토니우스는 적보다 훨씬 더 많은 육군을 갖고 있었고 해군은 약했다.
그리스인들을 닥치낸대로 잡아다 수병의 숫자만 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육지에서 결판을 내고 싶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바다에서 싸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 해군의 공격으로 이집트 함선 60척이 도망쳐버렸다.
악티움 대해전은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플루타르코스
46~120
그리스의 철학자
카이로네이아(델포이 근처)의 부잣집에서 출생
플라톤 아카데미 출신
로마에도 여러번 다녀온다.
서기 90년쯤 고향으로 돌아와 시장직
델포이의 성직자
그의 작품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전기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 도덕에 관한 글이다.
전기는 도덕적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삶을 이야기하는 첫 마디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이 이야기가 역사를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위인들이 행한 선악과 그들에게 닥친 운명이 얼마나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나 탐험하는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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