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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슐루스(독일-오스트리아 합병), 홀로코스트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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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둡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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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map/anschluss-march-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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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khan.co.kr/article/201401031926315

 

안슐루스 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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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카드의 형태로 만든 이 지도는 1938년의 안슐루스(합병)를 기념하고 있다. 합병의 결과 오스트리아는 제3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지도에서는 합병의 설계자였던 히틀러가 압도적으로 돋보인다. 히틀러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즉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 하나의 지도자”이다. 지도를 보면 나치의 그 다음 목표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제국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일부 지역과 원 독일과 동프로이센을 갈라놓고 있는 소위 폴란드 회랑이다.

<하략>

 

 

 

https://wiki.onul.works/w/안슐루스

 

안슐루스는 1938년 3월 12일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사건이다. 19세기부터 이어져 온 독일 민족주의와 통일 열망,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혼란, 그리고 나치 독일의 팽창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자신의 고향이자 '더 나은 독일 국가'로 간주하며 병합을 강행했다. 국제 사회는 영국의 소극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는 결국 주권을 상실했다.

안슐루스는 국제법과 민족자결주의를 무시한 침략 행위였으며, 이는 더불어민주당의 가치와 상반된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고, 수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이 나치 정권에 협력하거나 희생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립을 회복했지만, 안슐루스의 유산은 여전히 오스트리아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과거사 청산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며, 이는 과거사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하략>

 

 

 

https://encyclopedia.ushmm.org/content/ko/article/nazi-territorial-aggression-the-anschluss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은 두 국가 간의 통일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을 위반한 것이었다. 안슐루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설립된 유럽 질서를 대한 나치의 경멸적인 태도를 발휘했다. 이 사건은 나치 독일의 최초 영토 확장이었다.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은 국제 조약을 위반한 나치 독일을 처벌하지 않았다. 상당히 유화적으로 안슐루스를 허용했다. 이 때문에 훗날 아돌프 히틀러는 팽창 정책을 방해 받지않고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중략>

수년 동안 오스트리아 정치는 분열과 정치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1933년 나치 당원이 부상하면서 상황이 더욱 불안정 되었다. 그 순간을 포착한 오스트리아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Engelbert Dollfuß)는 오스트리아를 민주 공화국에서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우익 권위주의 정권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정부는 법인형 국가(Ständestaat)로 불렸다. 오스트로파시스트(Austrofascist) 국가 또는 돌푸스-슈슈니크(Dollfuss-Schuschnigg) 정권라고도 한다. 돌푸스 정권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권위주의적 헝가리와 외교적 동맹을 맺었다. 

동맹국들처럼 돌푸스 수상은 오스트리아의 좌익 세력을 해체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돌푸스와 오스트로파시스트들은 나치가 아닌 것을 참고해야 된다.  

<중략>

히틀러가 1934년 6월부터 쿠데타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분명했었다. 히틀러가 임명한 오스트리아 나치 운동의 지도자인 테오도르 하비치는 오스트리아 나치와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 

하지만 쿠데타가 실패하자 히틀러는 어떠한 개입을 부인했다. 나치 정권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음모가 틀어지면서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하려면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들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일을 더 천천히 진행하려고 했다. 

돌푸스가 사망한 후 쿠르트 폰 슈슈니크(Kurt von Schuschnigg)가 오스트리아 수상이자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전임자가 진행했던 많은 권위주의 정책을 계속 해나갔고 수천 명의 오스트리아 나치를 체포했다.

<중략>

3월 9일 슈슈니크 수상은 오스트리아 독립을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다. 3월 13일 일요일에 국민투표를 예정했다. 

국민투표로 유권자들에게 오스트리아 독립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도록 요청했다: 

“자유, 독일적, 독립, 사회적, 기독교적인 강한 오스트리아를 위하여! 민족과 조국을 공언하는 국민의 평화, 일과 평등을 위하여.” 

다음 날 유권자들이 오스트리아 독립을 지지하도록 촉구하는 홍보물이 도처에 나타났다. 심지어 거리와 보도에도 그려졌다.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 국민이 독립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투표 결과가 독립 찬성 65%, 반대 35%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히틀러는 국민투표에 분노하여 즉시 행동하기 시작했다.

 

3월 13일 오스트리아 나치 수상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재통일"(Wiedervereinigung Österreichs mit dem Deutschen Reich)이라는 법을 서명했다. 

"재통일"이란 틀린 말이다.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독일 제국의 영토이었던 적이 없었다. 안슐루스 법명이라고도 부르는 수단으로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 병합을 합법적인 병합으로 병합하게 된다. 그것은 안슐루스에 합법성의 부여했다. 

독립을 잃은 후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의 지방(Land)이 되었다 그리고 나치는 바로 오스트리아 정체성을 없애려고 했다. 먼저 오스트마르크(Ostmark)으로 지명했다. 원래는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로 "동부 제국"을 의미하는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라고 불렸으니 이러한 이름 변경으로 오스트리아는 제국부터 속주로 강등된 것이었다. 이후 행정 개편으로 지명과 행정 구역이 계속 변경되었다. 1942년에 나치 정권은 이 행정 지역을 알프스 도나우 지역(Alpen- und Donau-Reichsgaue)라고 불렀다.

법은 또한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에 대한 새로운 국민투표를 4월 10일에 예정했다. 

 

<중략>

오스트리아 나치와 그 외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구타하고 공격하고 모욕했다. 유대인들을 공중 화장실을 청소하거나 굴욕적인 행동을 하도록 강요했다. 종교적 유대인들이 특히 표적이 되었다. “걸레질 단체"(Reibpartien)로 동원되는 것이 비엔나 유대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도시 거리를 문질로 씻으면서 군종의 조롱을 받아야 되었다. 이들은 특히 슈슈니크의 취소된 국민투표 전에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적 슬로건을 지우도록 강요했다. 

오스트리아 유대인들도 곧 나치 독일의 반유대인 차별 법률과 제제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하여 비엔나 영사관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중략>

안슐루스: 히틀러의 유럽 팽창의 첫 단계 

안슐루스는 나치 정권의 첫 영토 확장으로 팽창 정책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국제 사회는 안슐루스를 막기 위해 개입하지 않았고 국제 조약을 위반한 독일을 처벌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안슐루스는 국제 사회가 아돌프 히틀러의 팽창정책을 유화적으로 대흥 한 중요한 초기 사례이다. 

오스트리아 병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질서 붕괴의 시작이었다. 불과 6개월 후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주데텐란트(Sudetenland)에서 또 위기를 초래했다. 1938년 9월 이탈리아, 프랑스와 영국 지도자들이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한다. 끝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권을 유지한다는 조권에 영토를 양도하여 히틀러를 달랬다.

그러나 1939년 3월 나치 독일은 이 협정을 깨고 프라하와 전 체코 영토를 점령한다. 다음 1939년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한다. 촉발된 영토 확장과 팽창 주위의 결말이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ustria&no=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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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합병에 대해서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는 국가들과 국민들은 없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자신의 안위에만 눈이 멀어 입을 닫았고,

나치를 반대하는 국민들은 나치에 의해서 수감되거나 혹은 신변의 위협으로 현실에 수긍하거나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 할 수 밖에 없었죠.

참고로 파시스트 국가와 특히 이탈리아는 오히려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매우 환영했습니다.
 

 

물론 1차 대전의 승리국들이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망 조약을 이야기하며 독일에 항의 했지만 그냥 말로만 항의하고 말았죠.

조약의 내용 중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은 20년 동안 금지라는 내용이 있었으나 이는 서류상에 불과 했죠.

 

 

이후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로서 주권행사를 하지 못 했고. 결국 전쟁 막바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연합국들이 오스트리아 임시정부를 승인하였지만 실제로 오스트리아가 완전한 주권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10년후인 1955년이었습니다.

이시기는 미국과 소련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전쟁으로 열강들의 패권다툼으로 오스트리아는 분할되어 고통을 받았지만

그들은 단지 빈의 쇤부른 궁전에 자신들의 이익만 얻기 위해 샴페인만 먹고 있었죠.

 

나치의 안슐루스는 일본의 을사늑약과 완전 똑같습니다.

(아주 좆 같은 놈들끼리 똑같이 노는구나)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할 때 한일합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실제로는 내선일체라고 선전했죠.(하... 짜증나)

내선일체란? 일본 제국이 일제강점기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통합시키기 위하여 내세운 표어로, 곧 내지와 조선이 한 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는 조선인의 민족 정체성을 사라지게 하여 일본으로 편입시키려 한 민족말살정책 입니다.

 

단지 다른 게 있다면 게르만 민족 계열인 오스트리아를 투표를 이용해서 합병한 독일과 다르게 일본은 강제로 합병했죠.

 

참고로 네덜란드는 인과응보라고 생각함 지들이 무수히 죽인 원주민 생각하면 혐오스럽다. 정말

 

출처-위키백과-, 사진출처-나무위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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