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성덕임(의빈 성씨) 드라마와 역사의 차이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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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 덕임은 후에 의빈 성씨로 책봉된다.
성덕임의 아버지는 드라마에서는 사도세자의 호위무사로 ,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를때 함께 처형당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 성덕임의 아버지는 성윤우가 이름이며, 홍봉한의 청지기였다고 한다. 홍봉한은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이다. 드라마에서는 성덕임이 혜경궁 홍씨네 청지기의 양녀로 나오는데, 이는 역사를 약간 각색한 것으로 생각된다. 늦은 나이에 드라마에서처럼 무관이 되었고, 여러 직위를 거치다가 1769년(영조45년)에 사망했다. 성덕임은 영조29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성윤우는 마씨와 초혼 후 사별, 임씨와 재혼 후 사별, 지씨와 삼혼했다. 3명 사이에서 5남 3녀을 낳았다고 한다.
의빈 성씨의 입궁 계기는 성윤우가 관리와 함께 나라에 바칠 돈을 탕진한 사건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록과 승정원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풍산 홍씨 가문과의 인연으로 이후 혜경궁 홍씨가 성덕임을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 입궁 전 친모(임씨)는 사망했고, 부친 성윤우는 와병 중으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드라마에 필사 장면이 매우 많이 나오는데, 1773년(영조 49년) 봄, 정조의 여동생 청연공주(당시 20세), 청선공주(당시 18세), 궁녀 덕임(당시 21세, 훗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영희, 경희, 복연 등 궁중 여인 6명이 《곽장양문록(郭張兩門錄)》(전 10권 10책)을 필사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의빈 성씨가 필사한 부분에는 '의빈 글시'라는 마크가 있다.

1773년이면, 필사를 주도했다는 청연공주(1765년)와 청선공주(1766년) 모두 혼인하여 사가에서 살던 시기이다. 그런데 어떻게 궁녀들과 10책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필사했는가는 의문점으로 남는다고도 한다. 드라마에서처럼 궐에 자주 들어왔나 싶기도 하다.
"어제의빈묘지명은 "정조가 후궁 의빈 성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손수 쓴 묘지명. 의빈 성씨가 사망한 1786년(정조 10년)에 작성했다.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 2번이나 차인 흑역사와 끝내 맺어진 러브 스토리를 직접 기록했다. 1766년, 정조는 의빈 성씨에게 차였다(...). 그로부터 약 7년 뒤인 1773년, 의빈 성씨가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함께 《곽장양문록》을 필사한 것을 보면, 정조를 차고 나서도 정조의 두 여동생들과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묘지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드라마에서처럼 실제로 의빈 성씨는 승은을 거절하다가 승낙하였다고 한다. 1766년(영조 42년)에 정조가 승은을 내자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세손이던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다.
의빈 성씨의 아들이 왕세자가 되었는데, 그가 문효세자이다. 능은(효창원) 3세(만1세)에 왕세자 책봉했는데 단명했다. 이어 의빈성씨가 연이어 죽어 정조는 매우 상심하게 된다.
의빈은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었는데,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곧 중병에 걸렸고 본궁(친정)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정조가 그날그날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으나] 병은 결국 악화 되었다. 결국 1786년(정조 10년)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중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는 고스트같은 인물인 효의왕후는 후궁 의빈이 죽었을때 친자매가 죽은 것처럼 통곡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은 나이가 서로 동갑이기도 하고 입궁시기도 같으며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홍예동(紅霓洞)은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정조의 맏아들 文孝世子와 그의 생모인 성빈 성씨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다.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홍예처럼 보이기 때문에 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
대부분 나무위키 등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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