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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세계 속으로 | 신항로 개척과 유럽 지역 질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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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둡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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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가 떨어지고 국민의 신앙심도 줄어 들자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아졌다. 영국의 위클리프와 독일의 휘스는 14세기에 이미 종교 개혁 운동의 필요를 부르짖은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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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신항로를 개척해야 하는가?


동양에 대한 관심 증대

              십자군 전쟁 이후 동방 무역이 부활되어 향료, 비단, 보석과 같은 동방 물산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동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다녀와서 쓴 '동방견문록'은 유럽인들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장악

              15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장악하여 동방 무역을 방해하자,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욕구가 한층 강해졌다.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지리적 지식과 항해술의 발달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알려졌다. 또한 나침반을 항해에 이용하게 됨으로써 원양 항해가 가능해졌다.

              새로운 항로의 개척에는 강력한 군사력의 후원과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강력한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자에 의해서만 제공될 수 있었는데. 이에 앞장선 나라는 포루투갈과 에스파냐였다. 두 나라는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여 지중해 무역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탐험과 원앙 항해를 적극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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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로개척

 

              항해왕자 엔리케가 아프리카 탐험대를 조직하고 후원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에 존재한다던 프레스터 존의 기독교 왕국(사제왕 요한)을 찾는 데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엔리케 왕자의 편지를 들고 프레스터 존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를 찾아 나섰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대신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여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된다. 어디엔가 있다고 믿은 전설적인 그리스도교왕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발견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어 이슬람교도의 우세를 꺾으려 한 정치, 종교적인 의도도 있었다.
 

바스톨로뮤디아스의 희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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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특히 동인도를 찾겠다는 희망의봉

 

 

바스코다가마의 인도항로 발견

              1497년 리스본을 출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브라질에서 약 1000km인 곳 까지 갔다.

그 후 희망봉 북쪽 약 50km에 있는 케이프타운 북쪽에 도착하였다. 계속되는 항해 도중에 이슬람교도들의 적대적 방해로 시달림을 받았으나, 수로(水路) 안내인 이븐 마지드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횡단하였다. 그의 안내로 1498년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의 인도 남서 해안의 항구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인도항로 발견을 기뻐한 포르투갈은 대규모 선대(船隊)를 파견하여 힘으로 인도양의 이슬람 상인의 세력을 제압하고, 향료ㆍ도자기ㆍ생강ㆍ향목ㆍ진주ㆍ다이아몬드ㆍ루비를 싣고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의 대사업을 성취하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원조를 얻어 1492년 산타마리아, 니냐, 핀타 세 척의 배는 인도로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드디어 1492년 한 해변에 도착하였다. 콜럼버스는 이 땅을 '구원의 성자'란 이름의 '산 살바도르'라고 불렀다. 신대륙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 땅을 진짜 인도 대륙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어진 네 번의 항해도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후  1497년 브라질을 탐험한 아메리고베스풋치의 항해기로 신대륙이 널리 알려진 뒤 그 이름은 비로소 아메리카가 되었다.
              콜럼버스는 담배를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으며, 그가 발견한 서인도 항로는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

 

마젤란의 세계일주

              포루투갈 출신인 마젤란은 에스파냐로 건너가 세계 일주를 계획하게 된다.  (지구구형설 입증)
              바스코다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으로 인도와 동남아 지역에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마젤란이 물루카 제도로 가는 서쪽 항로를 개척에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적극 후원한다.1519년 드디어 5척의 선박으로 세르비아 항을 출항한다. 고생 끝에 태평양을 횡단하고 오세아니아의 괌 같은 섬들에 정박, 드디어 동남아시아 지역에 도착한다. 그 후에도 그는 식민지를 개척을 위한 항해를 계속 한다. 필리핀 군도도 이런 식으로 식민지를 개척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젤란을 거부하는 지역을 점령하러 갔다가 전사한다.
              마젤란은 신항로 개척하는 동안 새로운 해협, 남아메리카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마젤란 해협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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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

 

역사적으로는 16세기에부터 18세기에 걸쳐 나타났던 절대왕정은 무엇일까?


절대왕정을 그대로 풀이하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왕이 통치하는 정치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서 절대적인 권력이란 ‘비교할 수 없울 만큼 강한’ 권력을 의미한다. 즉 16-18세기 역사적 상황에서 몰락해 가는 봉건귀족들은 더 이상 왕권에 도전할 수 없었고, 새롭게 등장한 시민 계급은 아직 지배 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그 어떤 세력의 견제도 받지 않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그러한 국왕을 절대군주라고 한다.


따라서 절대왕정은 봉건귀족에 시민계급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봉건 사회에서 시민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귀족과 시민 사이의 세력 균형이 개지는 순간 절대 왕정은 흔들렸다. 결국 시민혁명에 의해 절대왕정은 무너진다.
 

 

절대왕정의 두 기둥 관료제와 상비군

 

관료제는 봉건사회의 영주· 교회· 도시 ․ 지주 등 분열되어 있던 정치권력을 왕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데에서 성립하였다. 왕이 스스로 관료를 뽑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관료가 되기 위해서 왕에게 절대적으로 국왕에게 의존하고, 국왕에게 복종한다. 관료는 그 대부분이 귀족 아닌 ‘미천한 출신자’즉 중산층이나 시민계급출신이었다.


상비군은 왕의 군사적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만든 부대이다. 상비군의 주력은 돈을 받고 근무하는 군인(용병)이었다. 용병은 목숨을 건 위험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고용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적으로는 후진 지역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하층 출신자로 바꿔졌다. 국가에서 용병을 채용하면 부분적으로 실업을 해소하고, 하층민을 억압하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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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의 사상적 기반 왕권신수설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절대적이고 신성하며, 신하는 오직 국왕에게 복종할 따름이고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것, 이것이 왕권신수설이다.


프랑스의 보댕은 주권을 “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또한 어떤 상위자도 인정하지 않는 국가에서의 최고 권력”이라고 규정하고 그 내용으로서는 입법권, 군대 유지권 전쟁 및 평화체결권, 최고 사법권, 과세권, 화폐 주조권 등을 열거하였다. 보댕은 이러한 주권은 당연히 군주에 의하여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형성과정에 있던 절대왕정을 옹호하였다.


프랑스의 보쉬에는 가톨릭의 입장에서 절대왕정을 옹호하였다. 국왕은 지상에서의 신의 대리인이며,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적이며,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을 지고 신하에게는 오직 복정의 의무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영국의 홉스는 보다 근대적인 입장에서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하였다, 그는 <리바이던>에서 인간의 자연 상태는‘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이며 사람들은 이를 면하기 위하여 계약을 맺고 모든 자연권을 주권자인 지배자에게 양도하고 이에 국가가 성립하였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배자는 모든 권리와 권력을 흡수하여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고 하였다.

 

 

절대왕정을 유지시켜주었던 중상주의


중상주의 경제 정책
중상주의란 상공업을 중시하고 국가의 보호 아래 국산품의 수출을 장려하여 국부(國富)의 증대 시키는 것이다.
절대왕정은 관료와 상비군을 유지하고 국가를 통치하기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 이유는 관료에게는 봉토가 아니라 녹봉이 지급되었다. 그러므로 관료집단의 발생과 그 팽창은 자연 국가의 재정 지출을 증대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상비군들은 돈을 주고 고용하는 용병이므로 국가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조세제도를 마련하고, 국가재원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하였다.
초기에는 중금주의로 시작된다. 한 나라의 부 가운데 금·은 화폐를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여기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양의 금을 모으고 보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을 제외하고는 금을 얻을 방법이 없자 국가들은 무역의 차액을 실시하였다. 국가는 외국으로부터 수입을 적게 하고 수출을 많게 하여 그 차액을 얻는 것이 경제 중점사업이 되는 것이다. 무역의 차액을 얻기 위해서는 수입대체상품의 국내생산과 수출 공업의 육성과 보호가 중요하다. 이렇듯 중상주의는 경제활동 전반에 걸쳐 간섭과 통제, 그리고 보호․육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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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4세
절대왕정의 대표자 루이14세


성년이 된 루이 14세(Louis XIV)는 재상을 두지 않고 직접통치를 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우아하였으며, 위대한 지배자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추었다. 스스로 ‘국왕의 일’ 이라고 말한 국가 통치에 전념하였다. 
루이14세는 재무를 담당한 콜베르(Colbert, Jean-Baptiste)에 의해서 국부를 증강시켰다, 콜베르는 충실한 관리로서 콜베르주의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콜베르는 국가 재정을 개혁하고 각종특권을 부여하고 자본대여 기술 유치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프랑스 공업의 육성과 보호에 힘썼다. 수입억제와 수출증대를 도모하고 해외진출을 위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콜베르의 노력으로 17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국부와 국력은 크게 중대하였다.


루이 14세는 이러한 국부의 증대를 바탕으로 파리교외에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태양왕’을  자처하며 절대왕정을 과시하였다. 그의 베르사유에서의 궁정생활은 호화롭고 세련된 것이었으며, 유럽 각국의 군주나 국왕들이 이를 모방하려고 하였으며, 프랑스어는 유럽 외교계와 사교계의 언어가 되었다.
 

 

 

 

<<시민혁명>>

 

 

영국의 튜더왕조에서 시작


Anne of the Thousand Days(천일의 앤) - 셰익스피어 
영국 왕 헨리 8세와 비운의 둘째부인 앤 볼린의 로맨스를 그렸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는 모두 37편의 희곡을 남겼다. 그는 죽기 3년 전에 <헨리 8세>를 썼다. 


'헨리 8세'는 1509년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아버지 헨리 7세의 유약한 첫째 아들이 요절하자 '재수'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헨리 8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형수 '캐서린과 결혼 하였다.


당시 에스파냐는 유럽의 강대국이었다. 유럽의 각 왕국들은 정략결혼으로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캐서린이 바로 스페인의 공주 출신이다. 이런 비윤리적, 비도덕적 결혼에는 로마 가톨릭 교도 한몫을 거들었다. 형은 죽기 전까지 너무나 약해빠져서 육체의 순결성을 지니고 있었고, 그러므로 동생이 형수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로마교황청'이 정식으로 인정해줬던 것이다.
헨리8세는 '간판뿐인 왕비' 캐서린에게서 왕자만 얻고 싶었으나 딸 메리 하나만 낳는다. 남자아이는 낳았다하면 곧바로 죽었다. 그 후 헨리 8세는 무도장에서 '앤 불린'이란 처녀에게 빠졌는데 앤은 "정식의 결혼을 요구한다.
헨리 8세는 앤과, 결혼을 하기 위해선 캐서린과 이혼하려고 하는데 이때 이혼은 로마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야한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군사력 때문에 로마 교황청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국교회를 선포하여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하면서 이혼을 한다.
그러나 새 왕비 '앤'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한다. 헨리 8세의 절망감. 종교까지 바꿔가며,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수많은 신하들을 처형해 가며 여자를 얻었지만, 아들을 못 낳는 것에 대해서 또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앤이 이혼을 해주지 않자 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앤이 죽고 새 왕비를 얻는다. 그 후 헨리 8세는 그 후 5번의 이혼과 6번의 결혼을 한다.
이 내용이 바로 영화 <천일의 앤> 줄거리이다. 앤 블린이 왕의 눈에 띄어 왕비가 되고 딸만 낳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1,000일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것이다.


그 뒤 버림받은 여왕 캐서린이 낳은 딸 메리(1세)가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여러 면에서 피의 복수극을 펼친다. 메리가 죽은 후 왕권을 잡은 사람은 '천일의 앤'이 낳은 딸,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이다. 그녀가 여왕이 되기는 하였으나, 이 시기의 영국은 화폐가치 하락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 종교분쟁으로 인한 내분, 강대국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위협 등.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국교회를 확립시키고 의회와 타협해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무적함대인 에스파냐의 해군을 무릎을 꿇게 하는 등 과감해 개혁 정치를 시행하여 영국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는 엄마의 영향인지 그녀는 죽을 때까지 처녀여왕으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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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과 의회의 충돌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제임스 1세는(스코틀랜드 국왕으로는 제임스 6세, 잉글랜드 국왕으로는 제임스 1세, 후자로 주로 불림)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왕 헨리 7세의 증손(曾孫)이 된다는 명분 아래 영국의 왕으로 즉위하였다.그러나 그는 영국에 대한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는 영국 의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의회 자체를 부정하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다. 제임스 1세의 사상은 의회의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 성서 안에서 왕은 신으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그의 권력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신의 권력에도 비유된다. 
왕은 이 세상에서 일종의 신의 권력 내지 비슷한 힘을 행사라는 까닭에 신으로 불리는 것은 정당화하다, 신의 속성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왕과 일치하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은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고 파괴하고 만들고 없애는 권력, 생명체를 살리거나 죽이는 권력, 모든 것을 심판하고 누구로부터도 심판을 받지 않고 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권력 자신의 뜻대로 낮을 것을 높이고, 높은 것을 낮추는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혼도 육체도 모두 신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이것과 동일한 권력을 왕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신하를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한다. 그들은 높이고 멸하는 권력, 살리거나 죽이는 권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신하 전원에 대하여 모든 경우의 심판관이며, 나아가 신 이외의 다른 무엇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러한 제임스 1세의 정치적 생각은 영국의회의 반감을 가져온다.


제임스 1세 시대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국왕과 의회 사이의 긴장은 찰스 1세때 폭발하고 말았다. 영국 의회는 스튜어트왕조의  제임스1세 찰스1세의 전제 정치에 반발하여 권리청원을 제출한다.


“현재 소집된 의회의 성직자 및 귀족 그리고 평민들은 국왕 폐하께 다음을 간청한다.”


권리청원(1628년)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의한 일반적인 동의 없이는 어떠한 증여, 대부, 강제헌금, 세금 및 그 밖의 부담을 지지 않으며 또한 그런 일을  강요받지 않을 것.
누구도 이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그에 대해 답변하도록 출두 명령을 받거나, 구속 도는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통을 받거나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되는 일이 없을 것.
자유민 중 누구도 위에서 언급한 것들로 인해 투옥되거나 구속되지 않을 것.
지금까지 민가에서 묵고 있는 군인들을 기꺼이 철수시켜, 백성이 그것으로 인해 부담을 지지 않게 할 것.

 


청교도 혁명

25년 부왕의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의 절대주의를 더욱 강화하며, 전왕의 잘못을 확대·되풀이하였다. 그는 대(對)프랑스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의회의 승인도 없이 관세를 징수하고 선박세를 부과하였으며, 헌금을 강제로 징수해서 이에 응하지 않는 자들을 투옥하였다. 또 병사들을 민가에 무단으로 숙박시키고 군법을 일반인에게까지 적용시켰다. 1628년 의회는 <권리청원>을 왕에게 제출하였는데 이에 찰스 1세는 1629년 의회를 해산하고, 40년까지 11년 동안 의회 없는 전제정치를 강화하였다. 그는 청교도들을 탄압하고, 관세법 강화, 독점권 남발, 기사강제금 징수하였다. 찰스 2세는 장로파가 우월한 스코틀랜드에 국교회를 강요, 이에 반대한 장로교들이 에든버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맹렬한 저항에 상륙도 못하고 철수하였다. 전쟁비용이 궁해진 왕은 11년간의 전제정치 끝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정치를 개선하지 않는 한 전쟁자금을 댈 수 없다는 의회의 확고한 태도에 부딪쳐 3주 만에 의회를 해산시켰다(단기의회). 그러나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스코틀랜드가 침입해오자 국왕은 배상금의 지불을 약속하고 화의를 맺었는데 그 재원을 얻기 위해 1641 11월 다시 의회를 소집하게 된 것이 <장기의회>이다
의회는 전제정치를 제한하는 개혁 작업을 하였다. 이를 찰스1세가 무력으로 탄압하자 왕과 의회의 대립에 심해졌다.

 

이에 영국의회는 찰스1세를 처형하고 1649년 영국 공화제를 선언하였다. 
“잉글랜드 및 그에 속하는 모든 영토의 국민은 앞으로 자유 공화국의 국민이 된다. 국민은 앞으로 자유로운 공화국인 이 나라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의회에 국민 대표로 파견된 사람들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관리 및 행정가로서 임명된 사람들에 의해서 통치되며, 국왕이나 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롬웰의 정치
장기의회의 개혁 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 의회에서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내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하였으나 크롬웰의 출현 이후 의회파가 우세하였다. 그는 1649년 찰스1세를 처형하고 나서, 공화제를 선언하는 등 국가의 민주화를 추진하였다. 공화국 이후 크롬웰의 군대가 실권을 가졌다. 그는 1653년 기존의 의회를 해산 하고 영국 헌정 사상 유일한 성문법인 <통치 헌장>을 제정하여 스스로 호국경에 취임하였다.

제 1조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이루어진 공화국 및 그에 속한 영토의 입법상의 최고 권한은 단지 한 사람 의회에 소집된 인민에게 있다. 이 단 한사람의 칭호는 호국경이라 한다,
제 4조 호국경은 의회가 개최되어 있는 동안은 의회의 동의에 따라, 국가의 평화 및 행복을 위해 육․해군을 두고 지휘한다.
제 5조 호국경은 다른 여러 나라의 국왕 및 국가의 우호 관계를 지속시키고....자문 위원 다수의 동의를 얻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거나 혹은 평화조약을 맺는 기능을 갖는다.

크롬웰의 호국 통치는 철저한 청교도 정치로서 일요일에는 극장 문을 닫고 음주, 주정, 도박 등을 금지하였다. 또한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크롬웰이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크롬웰은 너무 지나친 탄압 정책과 욕구 억제를 강요함으로서 인기를 잃었고, 결국은 다시 왕을 모시도록 만드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크롬웰이 죽은 뒤 영국국민들은 다시 왕을 모시기 원하였고, 그리하여 찰스 2세가 프랑스에서 오게 되었다.

 

찰스2세와 제임스2세
찰스 2세는 처음 10년간 조심스럽게 통치하였다. 점차 왕당파로 가득한 의회는 영국 국교회를 확립하고 비국교도에게 제약을 가했다. 이에 제임스 배척파는 청교도가 주축이었고, 반대파는 지주, 귀족, 성직자들이 중심이었다. 양파는 각각 전자는 휘그당, 후자는 토리당이라 불렸다. 이것이 영국 정당의 기원이다. 
찰스2세는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전제적인 통치를 하려고 했으나, 얼마 안가서 사망하였다. 그는 아들이 없어 동생인 제임스2세가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교도를 정부고위 관직이아 군대 장교, 그리고 대학에 임용하고 1687년 신앙 자유령을 선포하여 가톨릭을 비롯한 모근 비국교도 신앙의 유를 선포하였다. 
그는 심사령과 인신보호령을 폐지하고 상비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제임스 2세는 가톨릭의 완전한 부활과 의회 없는 전제정치를 실시하였다.

 

 

명예혁명


제임스의 전제정치에 대항하여 의회는 1699년 6월 30일 토리와 휘그당 양당의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 윌리엄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우리의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 스스로의 입장을 지키기가 곤란해졌습니다. 국민은 모두 신앙, 자유, 재산에 관한 정부의 현 정책에 불만을 느끼고 있어, 20명의 백성 중 19명의 변화를 바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귀족과 젠트리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전하가 상륙할 때 반드시 전하(네덜란드 총독 윌리엄)께 달려가 전력을 다하여 전하를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겠습니다.”
윌리엄이 이를 받아들이고 1688년에 영국에 왔을 때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망갔다. 의회는 2세가 스스로 왕국을 떠났기 때문에 ‘왕위를 공위상태’라고 선언하고 윌리엄 3세와 메리2세를 공동왕으로 추대하였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권리장전
의회는 1689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권리장전을 승인하게 한다.


문서의 정식 명칭은 『백성의 권리 및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정하는 법률이다.』
제1조 국왕은 왕권에 의해 의회의 동의 없이 법의 효력을 정지하거나, 법의 집행을 정지할 수 없다. 
제4조 국왕이 대권을 구실로 의회의 승인 없이 왕이 쓰기 위한 금전을 징수할 수 없다. 
제5조 국왕에게 청원하는 것을 국민의 권리이니, 그러한 청원을 했다고 해서 구금되거나 박해를 받을 수 없다.
제6조 의회의 동의가 없는 한 평상시에 왕국 내에서 상비군을 징집하여 유지 할 수 없다.
제7조 신교도인 신민은 그 상황에 따라 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자위를 위한 무기를 소유할 수 있다.
제8조 국회의원의 선거는 자유로워야 한다.
제9조 의회에서의 언론의 자유나 토론, 의사 절차는 의회 이외의 어떠한 재판소나 장소에서도 탄핵되거나 문제시 할 수 없다. 
제13조 모든 불편을 없애고, 법을 수정 강화시키기 위하여 의회는 자주 열려야 한다.
권리장전이 국왕에 승인됨으로써 영국의 정치는 의회주의의 전통을 확인한 것이었으며, 왕권을 제약하고 의회의 우위를 확인한 것으로 입헌정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 이 두 혁명을 통하여 영국의 입헌주의와 자유주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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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으로부터 독립, 자유>>

 

혁명전의 미국과 영국의 관계
영국은 식민지에 총독을 파견하고 있었으나, 실제 정치에는 식민지 의회에서 이루어졌다. 이 식민지 의회는 투표 자격으로 토지소유라는 제한이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민주적으로 구성되었다. 식민지 의회는 유럽 대륙의 어느 의회보다도 큰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1760년까지 총독과의 권한 투쟁은 식민지 의회에서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각 식민지는 처음부터 자유를 원하여 그것을 향유하여 왔고, 자치도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아메리카 식민지에는 영국의 법률이 그대로 실시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영국은 17세기 이래 식민지에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왔다. 1763년 까지 영국은 ‘건전한 방임’ 정책을 실시하여 중상주의적 통제나 종교 등에 관한 법률을 엄격히 실시하지 않았다.

영국은 왜 강압적인 정치를 시작했을까?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7년 전쟁이 끝난 후 크게 변하였다. ‘건전한 방임’ 정책을 포기하고 과세와 중상주의적 통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1760년 즉위한 조지 3세가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려고 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태도를 식민지에까지 적용하려하였으며, 둘째는 7년 전쟁의 전쟁비용과 신대륙에서 새로이 획득한 영토를 포함한 식민지의 방위비 등을 식민지로터 염출하려는 재정적 고려였다.
1764년 영국은 설탕을 비롯한 당밀을 수입할 때 관세를 붙이는 설탕법을 징수하였다. 이는 수입한 당밀로 럼주를 양조해 번성한 제조업자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그리고 신문, 책자, 법적 문서를 비롯하여 카드놀이와 카드 학위증서에 이르기 까지 인지를 첨부할 것을 규정한 인지법을 실시하였다. 9개의 식민지 대표들이 인지법 회의를 열고 “대표 없는 곳에 과세 할 수 없다” 헌정정인 원칙을 확인하고 실제적인 운동으로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 운동과 불수입 운동을 하였다. 
그 결과 인지법은 폐기되었으나, 영국의회는 1776년에는 타운센트법을 제정하여 차, 종이, 유리, 납, 페인트 등에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 타운센트 법 실시로 식민지 주민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1770년 3월 5일에 영국군과 시민들이 거리에서 격돌한 사건이 일어났다.'보스턴 학살 사건'이라고 하는 이 사건에서 영국군이 시위 군중을 향해 발포해 5명이 죽었다. 이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게 된 영국은 차에 대한 세금을 제외하고 다른 세법을 모두 폐지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의 상인들은 차세를 내지 않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차를 밀수입하였다. 식민지에 차를 공급해 온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차 밀수로 큰 타격을 입게 되어 1773년에 Tea Act(차 조례)를 제정하였다. 이런 영국의 정책은 영국이 식민지에 대해 과세권을 가지고 있음을 명백히 한 것이며, 동인도 회사에게 관세 없이 식민지에서 차를 팔 수 있게 한 것이다.



분노한 식민지인들은 차를 안 마실 것을 결의했고, 상인은 차 판매를 거부했다. 1773년 차를 싣고 보스턴 항구에 정박중이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의 선박에 인디안 으로 가장한 시민 50명이 난입하여 차 342상자를 바다에 던지는 사건인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본국에서는 강경책을 써서 결국 이것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본국에서 행한 강격책은 불관용법 5개를 만드는 것으로써, 제 1법령은 보스턴 항을 봉쇄하고 차값을 배상하게 하는 것이었고 제 2법령은 메사추세스의 특허장을 폐지하여 이 지역을 자치주가 아니라 직속령이 되게 하는 것, 제 3법령은 일체의 시민 집회를 금지하고 사형자로 고소된 자는 본국으로 소환하는 것, 제 4법령은 메사추세스의 각 도시는 이 법령의 시행을 위해 파견되는 군대를 부양하는 것, 제 5법령은 미시시피강 서쪽의 카톨릭 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제 5법령의 경우 당시 미국에서 청교도와 카톨릭 교도가 대립하고 있어 미국인들에게는 자극제가 되었다.)식민지 인들은 이 법들을 '참을 수 없는 법'이라고 불러 식민지와 영국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제1차 대륙회의
영국의 강압적 조치에 대항하기 위해서 조지아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 대표가1774년 9월 5일부터 10월 26일까지 제 1차 대륙회의(1st Continental Congress)를 열었다. 본국회의는 식민지는 영국인으로서 생명*지위*재산에 대한 권리가 있으므로'참을 수 없는 법'의 철회가 있기 전까지 영국과 무역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또  식민지 의회가 입법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진다는 것과 본국과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매운동을 벌이고 필요하면 1775년 봄에 제 2차 대륙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각 식민지에 전쟁에 대비해 주민을 훈련시키라고 권유하는 결의문도 채택했다.

제2차 대륙회의
식민지 대표들은 5월에 제2차 대륙회의를 열었다. 식민지 대표들은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화해를 청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영국 왕은 이를 무시하였다. 이에 식민지 대표들은 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공인하여 조지 워싱턴을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연합규약이 성립할 때 까지 실질적인 전쟁지도를 담당하게 된 대륙회의는 전쟁준비를 추진시키는 한편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공포하여 그들의 굳은 결의와 독립해야 할 이유를 내외에 천명하였다.

 

독립선언서
미국 독립 선언문은 1776년 6월에 선출된 5인의 기초 위원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대부분은 그 중 한사람이던 토마스 제퍼슨이 집필하였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한 민족이 다른 한 민족과의 정치적 결합을 해체하고, 세계 여러 국가 사이에서 자연법과 자연의 신의 법이 부여한 독립, 평등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인류의 신념에 대한 엄정한 고려는 우리로 하여금 독립을 요청하는 제 원인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조물주는 그들에게 몇 가지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그 권리 중에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인 것이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하였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치자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건 이러한 목적을 파괴하게 되었을 때에는 언제든지 그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이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이 내용은 로크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선언한 것이다.

 

미국의 독립전쟁에 왜 다른 나라들이 참전할까?
독립선언서의 공포로 식민지인뿐만 아니라 유럽의 자유애호가들이 적극 지원하였다. 처음에는 전세가 불리하였던 식민지군은 1777년 사라토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이를 계기로 국제정세도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즉 7년 전쟁에서 영국과 싸웠던 프랑스가 1778년 2월 식민지편에서 참전하고, 이어 에스파냐(1779)와 네덜란드(1780)가 식민지편에 가담하였다. 한편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무장중립(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는 중립국의 중립적 지위와 권리의 방위하는 것이다. 현대에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과 같이 군비를 보유하면서 중립 정책을 취하는 나라의 상태를 무장중립이라고 부르고 있다)을 선언하여(1780) 영국에 대항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유리한 국제적 지원 속에서 식민지군은 요크타운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1781) 이에 미국에서 전쟁이 계속되면 이로울게 없다는 영국 지도자들의 판단으로 1782년부터 미국과 평화 회담을 시작하게 된다. 이로써 1783년에 파리 강화조약으로 식민지의 독립을 승인하다. 북은 5대호, 서는 미시시피강, 조지아 남쪽 경제안의 지역을 그 영토로 인정하여 13개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드디어 독립! 헌법 제정으로 이어지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인 56명의 대표로 구성된 제헌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우리 합중국의 백성은 더욱 완벽한 연방을 만들고 정의를 수립하고 국내의 안녕을 보장 하고 공동의 방위를 갖추고,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이 자유의 혜택을 확실히 늘릴 수 있게 해 줄 목적으로 미국을 위해 이 헌법을 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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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 
제1항. 이 헌법에 의하여 부여되는 모든 입법 권한은 미국 연방 의회에 속하며, 연방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한다,
제2항 하원은 각 주의 주민이 2년마다 선출하는 의원으로 구성되며,(줄임)
제3항 상원은(각주의 주 의회에서 선출한) 6년 임기의 사원의원 2명 씩 구성한다,(줄임)
제10항 어느 주라도 연방 의회의 동의 없이는 수입품 또는 수출품에 대하여 검사법의 시행상 절대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과금 또는 관세를 부과하지 못한다.

제2조
제1항 미국의 사법권은 1개의 연방 대법원과 연방 의회가 수시로 만들어 설치하는 하급 법원들에 속한다.(줄임)
제2항 대통령은 미국 육․해군의 총사령관이 되며, (줄임)

제3조
제1항 미국의 사법권은 연방 대법원과 연방의회가 수시로 만들어 설치하는 하금 법원들에 속한다.(줄임)
제2항 사법권은 본 헌법과 미국 법률 그리고 미국의 권한에 의해 이미 체결되었거나 앞으로 체결될 조약에 의해 발생하는 모든 사건 대사와 외교 사절 및 영사에 관한 모든 사건에 미친다.

제6조
제2항 본 헌법에 의거야 제정되는 미국의 법률 그리고 미국의 권한에 의해 이미 체결되었거나 앞으로 체결될 모든 조약은 이 국가의 최고의 법이며 모든 주의 법관은 자기주의 헌법이나 법률 중에 이것과 다른 규정이 있을지라도 이 헌법을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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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미국, 프랑스 혁명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

영국·미국·프랑스 혁명은 새롭게 성장한 상공 시민층이 중심이 되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민 혁명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나라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영국혁명은 지주층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오랫동안 의회가 소수의 귀족에 의해 독점되었다. 
 

미국의 독립 전쟁은 처음부터 특권계급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영국의 식민 통치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시민 혁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는 여전히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사회의 전 민중들이 참여하여 이룩한 혁명으로, 절대 왕정과 봉건적 특권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시민 혁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세 혁명은 절대 왕정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진보성을 갖지만 혁명의 결과를 특정 계급(시민계급:선거권의 엄격한 제한)이 독점하려 했다는 점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의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시민혁명의 대표는 프랑스 혁명이다. 이 혁명은 프랑스 전 국민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일으킨 혁명이다. 
프랑스는 국민에게는 어떤 권리가 필요했을까?
왜 우리는 이 혁명을 시민 혁명의 교과서라고 생각하는 걸까?
18세기로 가보자!!!


프랑스의 신분
18세기 프랑스는 3개의 신분이 존재하였다. 

소수의 특권층인 제1신분 성직자의 수는 총인구 2700만명 중에서 극소수인 10만명 정도였지만, 전국토의 1/10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영주로서 지대를 받고 특권과 면세의 혜택을 누렸다. 제2신분인 귀족은 40만명 정도로서 전 국토 1/5 정도의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특권신분인 제1신분과 제2신분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의 대다수는 제3신분에 속하였다. 그 수는 전 인구의 96%에 달하였으며, 거기에는 가장 부유한 부르주아지로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계층이 포함되었다. 이 중에서 대다수는 농민으로서 총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한 토지 규모는 살아가는 데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지주에게 소작을 얻는 등의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또한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으로 그 수입의 절반은 빼앗겼으며, 이들에게 도로부역 같은 노동력 징발도 큰 고통이었다.
또한 이 당시 국가 전반의 경제 사정도 계속 약화 되었다. 1786년 영국과 맺은 자유 통상 조약(이든 조약)으로 영국의 값싼 상품이 유입되면서 프랑스 산업은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는 영국에 원료와 식량을 수출했는데 오히려 생필품 값만 올라 사회 불안이 점점 심해졌다. 당시 파리 노동 인구 가운데 실업자가 50%나 되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경제적 위기와 함께 왕실 재정의 위기는 혁명 발발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루이 14세 이래 약화된 재정은 루이 15세 때 더욱 누적되었다. 이에 루이 16세는 재정위기의 타결을 위하여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전개
프랑스 대혁명은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서 그 원인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인 구제도의 모순에 있었다. 앙시앵이란 '오래된', '낡은'이라는 의미이며, 레짐은 '제도'또는 '체제'를 의미이다. 따라서 앙시앵 레짐은 근대 사회로 변모해 가는 당시 상황에서 이미 낡은 제도, 즉 봉건적 신분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삼부회 소집
국가 재정상의 위기에 직면한 정부는 모든 토지 소유자로부터 현물세를 징수하려고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고등법원은 새로운 세금의 부과는 오직 삼부회만의 권한이라고 하여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의 이름 아래 삼부회의 소집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고등법원은 왕실 재정위기를 이용하여 과거에 상실했던 정치권력을 회복하고 절대왕권을 제약하여 귀족정치를 실시하려는 것이었다. 파산에 직면한 루이 16세는 1788년 여름,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고 있던 삼부회를 다음 해 5월에 소집할 것을 선포하였다.  

혁명의 시작


테니스코트의 서약
http://kr.encycl.yahoo.com/img


바스티유 감옥습격
http://www.jjulim.com/2web/2/img/
1789년 5월 베르사이유에 소집된 삼부회에서는 제3신분대표들이 신분별 회의를 지양하고 국민의회를 선포하였다. 귀족들은 거부하였으나 성직자대표들 중 하위 성직자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평민대표들은 그들의 회의 장소가 수리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자 실내 테니스코트에 모여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는데, 이를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라고 한다. 국왕도 하는 수 없이 귀족과 성직자대표에게 국민의회에 참가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삼부회는 사라지고 국민의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은 베르사유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무력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무장하기 위해서 무기와 탄약을 찾던 일부 민중은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민중의 눈에 압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함락은 혁명에 민중과 폭력이 개입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국민의회의 개혁


인권선언' 
카르나발레미술관소장
국민의회는 곧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고 8월 26일에는 앙시앵 레짐의 모순과 부조리의 타파를 염두에 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채택하였다. 국왕은 파리시민의 감시 하에, 국민의회는 파리시민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려는 국민 의회는 교회 재산의 몰수하여 매각하고, 길드의 폐지하여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교회 개혁을 위하여 수도원을 해체하고 모든 성직자를 선출제로 하여 국가가 봉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행정과 사법제도의 정비 등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가운데에 1791년 6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으며, 끊이지 않는 반혁명의 기운 속에서 혁명은 점차 과격해 졌다.  

 

로베스피에르
http://kr.encycl.yahoo.com/img/130/
혁명의 과격화와 공포정치
1791년 9월 국민 의회는 입헌 군주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서 입법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새 헌법 아래에서 참정권은 세금 납부에 따른 일부 시민에게만 부여하였으므로, 새로운 정치 체제는 유산계급 지배체제였다. 이 즈음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나라로 혁명 전파될 것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간섭으로 혁명전쟁이 시작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의용군이 파리에 모여드는가 하면 8월에는 혁명에 고무된 파리 민중이 왕국을 습격하여 방화하였다. 이에 입법 의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보통 선거에 의한 국민 공회 소집을 결의하였다. 국민 공회는 곧 공화정을 선포하고, 다음 해 1월 루이 16세를 처형시켰다. 1973년 6월 자코뱅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공안 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루이 16세의 처형 
http://aped.snu.ac.kr/cyberedu/cyberedu2/kor/kor11-03.html 
혁명 정부를 수립하였다. 자코뱅당은 모든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국내외의 사정으로 그 실시는 보류되었다. 공안위원회는 혁명 정부의 사실상의 행정부로서,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대파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한편 혁명정부는 공정 가격제 등의 통제 경제를 실시하고 봉건 공납의 폐지, 혁명력의 제정 등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강압적인 공포정치에 지쳐있던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1794년 7월 공포정치를 이끌었던 로베스피에르는 국민 공회 내의 반대파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한다.

총재정부


나폴레옹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mage&eq
로베스피에르 타도 이후 혁명재판소가 해산되고 공안 위원회의 권한이 극도로 축소되었고, 통제 경제도 포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75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행정부 즉 총재정부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대외전쟁으로 인한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면서 동요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총재 정부의 허약함에 실망하였고, 그들을 지켜 중 강력하고 유능한 군사적 지도자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폴레옹의 쿠테타로 총재정부는 쓰러지고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제 프랑스 혁명을 끝난 것이다.

<생각넓히기>
프랑스 혁명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 ․ 평등 ․ 박애의 이념이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소 인식되었다.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각국의 역사적 상화에 따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화 평등을 실현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모든 구별이나 차이를 넘어선 모든 사람의 자유를 뜻하는 자유, 
법적인 평등에서 나아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평등을 포함하는 평등
세계 평화의 이념이 박애의 이념
프랑스 혁명은 우의 3가지 자유 ․ 평등 ․ 박애를 내걸고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봉건적이고 귀족적인 구제도와 절대 왕정의 전제 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엔,s 한계가 있었다. 시민계급이 일으킨 혁명이지만, 이 때의 시민은 부르주아지로서 민중과는 구별되는 개념이었다. 민중의 대부분인 농민과 노동자는 혁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셈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지가 경제·정치를 장악하게 되었고, 선거는 제한 선거로서 유산자만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앞장선 농민과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참정권이 없었다.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또 한번의 혁명을 일으킨다. 그 혁명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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