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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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이 항복하면 길삼봉이 일본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조선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도 있었다.
길삼봉의 허깨비는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나 길삼봉은 어디에도 없었다. 헛갈리는 냄새는 짙었으나 자취는 없었다. 관군은 온 나라의 벽촌과 해안을 모두 뒤졌으나 길삼봉을 잡지 못했다.
마침내 길삼봉은 누구냐? 라는 질문은 누가 길삼봉이냐? 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질문의 구조가 바뀌자 길삼봉의 허깨비는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길삼봉으로 지목된 사람은 정여립이었다.
적들은 다시 아산 고향 마을로 들이닥쳤다. 면은 가족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와 불타다 남은 사랑채를 고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읍내에서 사람이 달려와 적들이 마을로 향했다고 알렸다. 면은 가족들을 다시 산 위로 대피시켰다.
바람이 잠들어 바다는 고요했다. 덜 삭은 젖내가 나던 면의 푸른 똥과 면이 돌을 지날 무렵의 아내의 몸냄새를 생각했다. 쌀냄새가 나고 보리 냄새가 나던 면의 작은 입과 그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생각했다.
송장으로 뒤덮인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그 씨내림의 운명을 힘들어하는 내 슬픔의 하찮음이 나는 진실로 슬펐다.
눈이 녹아내리는 봄물에 강물은 젖몸살을 앓듯이 불어났고 새파랗게 살아났다. 무안 쪽 강 언덕으로 펼쳐진 붉은 흙이 봄볕에 부풀어 있었다.
끼니때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장사진의 선두에 향도선嚮導船을 세웠다.
랑스어사전 예문1-1 / 1건
guide d'une escadre
함대의 향도선
놋좆
정의 : 한선식 큰 노를 젓기 위하여 멍에나 고물 하판 위에 꽂아 놓은 엄지 손가락 크기의 쇠꽂이 또는 참나무꽂이. 지렛목, 노지점(櫓支點)이라고도 함.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진린
전략적 차원이기는 하지만 소극적으로 일관한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달리 진린은 왜적을 토벌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력했고, 그로 인해 이순신도 그를 믿고 함께 작전에 나갈 수 있었다. 진린이 국내에서 이토록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것은 진린이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달리 이순신을 명나라에 천거까지 원했을 정도로 경애했기 때문에 그동안 이순신을 의심하고 시기했던 서인들의 행적들이 무안해지기 때문에 일부러 진린을 깎아내려 기술했다는 주장도 있다.
통제공의 명성은 중원에서도 우레와 같소. 적은 이제 물러갈 것이오. 내 보기에 통제공은 이 작은 나라의 장수라 하기에는 재주가 아깝소. 통제공은 큰 판을 주물러야 할 사람이오. 전쟁이 끝나면 좀 쉬었다가 대국으로 들어와 벼슬을 하시오. 내가 우리 천자께 공을 천거하리다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7]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고니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잘 싸웠으나 임진왜란 당시 육로에서의 병력 소모와 이순신에 의해 대패하는 바람에 물자와 병력을 크게 상실하여 7천 정도만 겨우 이끌고 참전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규모가 대국을 결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에 그나마 3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이끈 우키다 히데이에도 가신단 대부분이 배신한 상황에서 본인은 원래 무능하여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총사령관이 지휘관으로써는 최악인 이시다 미츠나리였다. 따라서 그냥 싸워도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판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까지 겹치자 결국 서군은 이에야스의 동군에게 말 그대로 전멸했고, 고니시 본인도 병력을 거의 다 잃고 후퇴하다가 전장을 이탈한 지 4일 만에 도쿠가와의 부하들한테 붙잡혀 1600년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이시다 미츠나리,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참수당했다. 고니시는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하지 않았고[17], 참수를 선택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이에야스에 의해 죽기전에 조리돌림을 당하는 온갖 수모를 겪은 후 참수되었다. 심지어 죽기 전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참수 시 불교의 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키리시탄(기독교인)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검단산성

돌산도

노량해전 노량항
중군
1 중군 中軍 : 예전에, 전군(全軍)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던 중심 부대.
고물 : 선박의 뒷부분
뱃고물이라 한다. 반의어로 이물이 있다. 고물자리라는 별자리가 있다. 선원들은 푸프(poop)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忠武公 年譜|
을사년乙巳年, 1545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1544년에 즉위한 인종은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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