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 ; 키케로 부터 카이사르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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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
bc 106-43
모두가 부러워하는 아이 키케로 ;ㅣ 천재
시, 웅변, 정치
무키우스와 사귀면서 법류 ㄹ 지식을 넓혔다.
bc90년에는 마르시아 전쟁 때 술라 군단에 들어가 전투에 참가.
정치가 안정되길 기다리며 정치를 멀리하고 그리스의 학자들과 사귀며 학문에만 전념
키케로는 아테네로가 학문과 웅변술을 배웠다.
술라가 죽자 정계에 발을 들여놓으라는 편지를 받아왔다.
로마에 돌아와 여러 변호로 유명해졌다.
키케로는 물려받은 집은 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팔라티노 언덕에 집을 짓고 살았다.
계속 출세해서 집정관이 되었고, 주변의 음모에도 안토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다시 당선되었다.
집정관에서 떨어진 카틸리네는 호민관 10인 위원회를 만들고 무제한의 권리를 주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이에 많은 귀족이 찬성했다.
안토니우스까지 10인 위원회에 찬성했다.
빚이 많은 안토니우스가 카틸리네와 손을 잡으면 로마는 위험해진다고 생각한 키케로는 마케도니아 총독을 제안한다.
카틸리네의 암살 계획 등 여러가지 고초를 겪은 키케로는 원로원에 힘을 받아서 안토니우스를 보내어 카틸리네를 소탕했다.
이후 로마 역사상 최초로 국부 칭호를 받았지만, 그 이후 키케로는 나르시즘에 빠지게 되고 인기가 날로 떨어지게 된다.
그후 로마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세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된다.
클로디우스가 호민관이 되고 권세를 부리게 되자, 카이사르에게 청해 멀리 피해있으려고 부장으로 임명해달라고 했으나, 클로디우스의 회유책으로 사퇴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앙심을 품고 클로디우스 일당과 손을 잡고 이간질로 폼페이우스와 키케로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후 키케로는 이곳 저곳을 떠돌며 슬픈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클로디우스의 반대로 귀국을 하지 못했다.
클로디우스는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고, 시민들은 그를 폭동죄로 재판을 받게 했다.
이에 폼페이우스가 힘을 얻어 클로디우스를 쫓아내었고 키케로를 귀국시켰다.
이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가 정권을 놓고 다투었고
옥타비아누스의 회유로 키케로는 그를 위해 열심을 다했지만
이후 집정관이 된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를 배척하고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손잡고 살생부를 만들어 키케로도 살해되고 만다.
폼페이우스
bc 106-48
bc 106키케로가 태아난 바로 다음 해에 폼페이우스는 로마 장군 스트라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군대를 함부로 휘두르고 탐욕이 가득하여, 집정관에 올랐지만 민중의 증오는 매우 컸다.
아버지와 달리 폼페이우스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용모도 출중했고, 성실한 생활태도, 웅변술, 무술 열정 등이 더해졌다.
23살에 장군이 되었는데 3개 군단을 이끌고 아묵시뭄이라는 도시로 출정했다.
세 적장이 그를 포위했으나 당황하지 않고 세 적장 중 브루투스 한 사람에게만 공격을 가했다.
그후 스키피오가 군사를 이끌고 폼페이우스를 공격해왔을 때, 로마의 실력자인 술라 장군이 폼페이우스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ㅇ이때 승리를 거둔 폼페이우스는 술라 장군을 매우 정중히 맞았다. 폼페이우스에 반한 술라는 '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건 물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했다. 젊고 아직 원로원 의원도 아닌 그를 이렇게 부르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술라 장군의 조언으로 메텔루스 장군을 도와 연전 연승하였다.
그 무렵 술라는 이탈리아를 무력으로 다스릴 수 있는 독재관이 되었다.
술라는 이후 폼페이우스를 설득하여 안티스티아와 이혼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임신한 딸을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는데 그 딸 아이밀리아는 전남편의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이후 로마사람들은 술라의 심복이 되어서 실망했으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술라는 아프리카를 손안에 넣고난 개선식에서 "마그누스(위대한사람)"이란 칭호를 하지만, 이후 폼페이우스 명성에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술라는 죽을 때 폼페이우스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뒤 레피두스 일당이 들고 일어났고, 이에 폼페이우스는 토벌군 사령관이 되어 브루투스 레피두스를 모두 몰아낸다. ㅇ이후 스페인 원정에서는 고전했으나 스페인군을 이끄는 세르토리우스가 암상당한 후 잔당을 쉽게 물리쳤다.
이때 다시 개선식이 거행되었고, 크라수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일인자가 되기 위해 공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이에 해군제독이 되어 해적을 소탕했다. 해적을 소탕한 후, 시리아를 점령했고 유태 왕국을 정복해 왕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아라비아 왕은 항복했다.
로마에는 그가 군대를 이끌고 와 독재 정치를 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병사를 해산해 고향으로 보내며 불안을 씻어주었다.
화려한 개선식 이후, 카이사르와 크라수스를 화해시킨 뒤 그들의 지지을 얻어 집정관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사람이 함께 다스리기를 원하여, 그의 딸 율리아와 폼페이우스를 결혼시켰다. 그때 율리아는 카에피오와 약혼을 한 상태였다. 폼페이우스는 개선하면서 아내 무키아와 이혼한 상태였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는 대신, 자기 딸을 카에피오와 결혼시켰다.
이래서 삼두정치'가 시작된다.
크라수스가 죽고나서 정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경쟁과 대결이 심각했다.
폼페이우스는 스페인, 아프리카에 부하 장군을 두고 로마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고, 카이사르는 부하를 로마에 보내어 원로원을 위협했다.
결국에는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포위망에 좁혀진 ㅍ폼페이우스는 간신히 도망쳤다.
셀레우키아 시가 제공한 함선을 타고 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에게 부하를 보내 협조를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 대신해 정무를 포던 포티누스는 폼페이우스를 죽이기로 결론짓고 아킬라스에게 그 일을 맡겼다.
폼페이우스는 결국 58세로 죽었고, 카이사르는 그의 죽음에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후에 아킬라스 일당을 처형했다.
카이사르
bc 100-44
카이사르는 17살에 평민당의 마리우스 파인 킨나의 딸과 결혼했다.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평민당 쪽이었다. 카아사르의 고모 율리아가 평민당의 수령인 대(큰 대) 마리우스의 아니애고, 아내 쪽도 평민당에 속해 있었다.
당시 로마는 벌족당과 평민당으로 갈라져 100년 간 내란에 휩싸여 있었다.
술라는 카이사르와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를 이혼시키려 했으나 코르넬리아가 말을 듣지 않아 보복했다.
술라는 벌족당이었는데 평민당을 쳐부수고 정권을 잡은 당시이다.
당시 마리우스의 잔당을 소탕하다 카이사르는 철저히 감시하지 못했었다.
여러 고생을 하다 해적에게 몸값을 요구 받는데 돈도 없이 더 큰 돈을 내겠다고 하던 카이사르는 몸값을 가져온 부하들과 해적들을 모두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카이사르는 웅변술을 늘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행사를 치르느라 엄청난 빚을 지게 된다.
호민관 선거에 나가 당선되어 정치가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그 후 마리우스의 아내이며, 카이사르의 고모인 율리아가 사망했다. 이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게하고 마리우스의 초상화를 들고 나왔다.
이 마리우스 파를 소생시켜 자기 휘하에 두려는 속셈이었다.
마리우스의 동상과 승리의 여신상을 만들어 밤중에 몰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세워 놓자 사람들은 감탄했다.
대사제 메텔루스가 사망하자 카이사르는 출마를 선언했다. 대혼전을 빚었으나 결국 카이사르가 승리하였고, 이후 원로원과 귀족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법무관으로 있는 동안 어떤 소요사건도 생기지 않았다.
클로디우스는 당시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를 원했는데, 여자 가수로 분장하고 여신회에 진입했다 들통이 나고 만다.
이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아와 이혼한 뒤 법정에서 클로디우스 구명 운동에 나선 민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짓 증언까지 했다.
법무관의 임기를 끝으로 스페인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빚이 그때까지 많아서 빚쟁이들이 몰려왔는데 크라수스는 대신 갚아주었다.
스페인으로 떠나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여러 도시를 화합시켰다. 병사에게도 존경을 받아 '대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리었다. 돈과 명예를 함께 얻게 된다.
로마로 돌아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화해시킨다.
이후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여러 민중들의 인기를 끌기 위한 새로운 법안을 제안했다.
귀족들은 반대했지만 이 셋은 삼두정치를 하며 민중의 인기영합 정치를 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이후 폼페이우스의 힘을 얻기 위해 약혼 중인 딸 율리아를 그에게 시집보낸다.
이후 아내와 불미스러웠던 클로디우스를 호민관으로 선임하는데 이는 키케로를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귀족들은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 여러가지 일을 서슴지 않는 그를 비난했다.
게르만, 벨가이 족을 싸워 이기고 네르비 족을 전멸했다.
이후 자기 세력을 키우고 정치공작을 하기 위해 심복은 로마로 보내고, 힘있는 정치인들은 전장으로 불러들이곤 했다.
이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비롯해 200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를 찾아와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다음해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카이사르에게 군자금을 주어 5년간 더 갈리아를 통치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이후 카이사르는 라인강까지 넘어가며 게르만 족을 섬멸했고, 브리타니아의 대부분도 정복했다. 갈리아로 돌아오니 폼페이우스의 부인이 된 딸 율리아가 출산 중 사망한다.
갈리아

로마 제국이 프랑스 지역을 가리키던 말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지 2년 뒤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을 그만두고 로마로 돌아왔다.
파르티아 왕국을 점령하려고 떠낫던 크라수스가 전사하고 만다.
그러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두 사람의 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안식국이 파르티아를 뜻한다.(아르사케스의 음차)
카이사르를 키워줬다고 생각하는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실각을 자신했고, 카이사르 또한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벌족당과 평민당은 선거 때마다 심하게 싸웠고 무법천지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차라리 독재정치를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다.
이후 단독 집정관이 된 폼페이우스는 최고 권력을 쥐었고,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총독 임기를 연장시켜주었다.
카이사르는 즉각 집정관 후보에 나서고 본인의 총독 임기 연장도 요구했다.
결심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해임하고, 빌려 준 자신의 군대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을 돌려보내면서 돈을 주어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전쟁에 지쳐있고, 카이사르의 지휘방식에 신물이나 폼페이우스의 병사가 되기를 원한다는 작전인데 폼페이우스의 판단력을 흐려 놓기 위한 계략이었다.
반면에 카이사르는 돈을 마구 뿌려 반대편 사람들이었던 쿠리오와 그의 친구인 안토니우스도 같은 편에 서게 한다.
호민관 쿠리오는 카이사르를 대신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동시에 사임하고 시민의 심판을 받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원로원이 해산되었고, 키케로가 화해하던차에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은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결정을 했다.
카이사르는 몰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에 ㄷ도착하여 그 유명한 말을 외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마 공화국이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하여 이탈리아 반도 중북부의 에트루리아 계통의 도시국가를 복속시킨 이후로는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고대 로마 집정관이 해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자신이 이끌던 군단들을 이 루비콘 강에서 해산시키고,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오는 풍습이 생겼다. 그리고는 차기 집정관 선거를 나갈 준비를 해야만 했고, 자신이 이끌던 군단들은 로마로 돌아와 자신의 사령관에게 표를 행사할수 있었다

이탈리아를 완전히 점령하고 스페인으로 진격해 폼페이우스의 부관 아프라니우스와 바로를 몰아낸 뒤 그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카이사르는 쿠리오를 시칠리아 섬에 보내어 카토군을 몰아냈다.
자신과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를 집정관으로 선포한 뒤 원정길에 올랐다.
퐁페이우스를 계속 찾아 추격했다.
카이사르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지만 그때는 이미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뒤였다.
그 무렵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으 ㅣ왕위 다툼이 치열했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와 화해시키려고 국외로 쫓겨났던 클레오파트라를 불러들였다.
암살음모를 알아챈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패전 후 나일강쪽으로 달아났고, 왕위에 오른 클레오파트라는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13세와 결혼하지만 자주 싸우게 된다. 13세는 싸움페 패해 죽임을 당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를 다스리게 된다.
클레오파트라는 뒤에 카이사르의 아들을 낳았는데, 알렉산드리아 인은 그 아이를 카이사리온이라 불렀다.
이후 여러 원정을 승리한 카이사르는 성대하게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리고나서 종신집정관에 임명했다.
여러 사람에게 관직을 주고 폼페이우스의 동상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율리우스 달력을 만들었다.
그 무렵 로마의 민심은 브루투스에게 쏠리고 있었다. 카이사르를 살해하기로 한 음모자들은 그를 끌어들였다.
3월 15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술가를 뒤로하고 카이사르는 왕으로 추대할 거라고 예상한 회의장에서 가장 믿었던 브루투스의 칼에 맞아 살해된다.
"브루투스 너마저"
당시 56세였다.
브루투스는 "독재를 넘어 왕이되려한 카이사르를 처치했다는 연설을 하고 민중들은 애도와 존경의 뜻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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