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루타르크 영웅전 ; 브루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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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
bc85~42
브루투수는 타르퀴니우스 왕가를 멸망시키고 로마의 자유를 지켜 낸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자손이다.
로마의사당 앞에 그의 동상을 로마시민들은 세웠다.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ㅌ태어나 외삼촌의 딸 포르키아와 결혼했다.
출세를 위해 공부다혹 웅년술도 연마하고, 그리스어 공부도 했다.
당시 로마는 폼페이우스 파와 카이사르 파가 치열하게 싸워 혼란스러웠다.
브루투스의 아버지는 폼페이우스에게 살해되었다.
아버지를 죽였지만, 독재자 카이사르보다는 폼페이우스가 더 정의롭고 떳떳해 보인다는 생각을갖고, 폼페이우스를 찾아갔다.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의 명령에 따라 세스티우스의 부관이 되어 킬리키아로 떠났다. 그런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마침내 결전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카이사르 역시 브루투스를 몹시 아껴 부하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전투가 벌어져도 브루투스만은 절대 죽이지 말라."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를 연모했다. 그래서 자기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폼페이우수는 카이사르에게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브루투스는 라리사 지방으로 몸을 피한 뒤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브루투스를 용서하고 자기 곁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폼페이가 이집트에서 죽기 까지 거쳐를 카이사르에게 알려주어 신임을 얻는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친구이기도 하고 처남 매부 사이기도 하고 라이벌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두 사람 모두에게 그 자리를 줄 것처럼 희망을 준 뒤 말했다.
가장 높은 자리는 브루투스를 주고 그 다음은 카시우스한테 주기로 했소
이후 둘의 사이가 서먹해졌고,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사람들은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감추어진 아들이라 생각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점차 독재자가 되어갔다.
브루투스는 은인이 독재자가 되어 괴로워했다.
카이우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웠고, 브루투스는 자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이 있는 것을 본 후 암살 계획에 가담하게 된다.
카이사르를 죽인 뒤, 브루투수는 연설을 하기위한 장소로 걸어갔다.
안토니우스도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브루투수가 나서서 막았다.
여러분 나는 오늘 카이사르를 죽였습니다. 그를 ㅈ죽이기까지는 정말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도 ..... 로마의 자유를 더 사랑하고 로마 시민을 존경합니다."
브루투수는 카이사르의 장례식에 찬성하고 이에 안토니우스는 상복을 입고 울먹이며 교묘한 웅변으로 브루투스의 인기를 본인에게 기울게 했다.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시민들에게 그의 돈을 나눠주게 했다.
시민들은 이에 카이사르를 화장해주고 그의 암살자들을 처단하라는 주장에, 브루투스와 그의 동지들은 망명을 하게되고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차지하게 된다.
그 무렵 카이사르의 조카이며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돌아왔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무시하고 물려받은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 민심을 얻고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을 끌어 모았다.
브루투스는 아테네에서 공부를 하며 은밀히 전쟁을 준비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동맹군이 로마에서 싸우게 되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필리피 지방과 여러 도시를 정복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필리피에서 참패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 군을 무찔렀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가 승리했을 거라 생각하고 도우러 가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패배를 알게 되었다.
늦게 합류하러 갔으나 이미 카시우스는 자결했다.
이후 브루투스는 계속 승리하다, 적군에 포위당하고 패하다 자결하고 만다. 그의 나이 43세 였다.
역사상 기록에 남은 사람 중 브루투스란 이름을 가진 인물 중에서 가장 오래전의 인물은 왕정을 마무리하고 로마 공화국을 창시했다고 알려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다. 이외 유명인물로는 다음 두 사람이 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둘 다 동년배이며 카이사르 암살의 공범들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데키무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매우 신임한 부하로 사건 당시 키살피나 총독이었고,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의 정부인 세실리아의 아들로 카이사르가 아꼈고 사건 당시 법무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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