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뜻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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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둡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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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에 박정희 정권이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거론, 동년도 5~6월에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어 전개된 농촌 계몽 운동이며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動)을 3대 정신으로 꼽았다.
근면 자조 협동이 문제의 답인 경우가 내게는 많았던 것같다.
1969년 11월에 농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고, 이어서 1971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한다. 1973년부터는 대통령실과 내무부에 관련 조직이 설치되었고, (내무부 지방국 새마을지도과,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새마을지도자연수원(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의 전신)이 신설되어[3] 새마을운동 지도자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새마을운동 계획자는 前 건국대학교 부총장이자 농업전문가, 유대인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 박사다. 고학으로 대학교까지 졸업한 류 박사는 앞으로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우연치 않게 덴마크 왕실의 후진국 특례 유학생 제도가 있음을 확인하여 영문으로 자신의 농촌 계몽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그 뜻이 수용되어 약 10여년 간 유럽 각국과 이스라엘 등을 다니며 농촌 계몽과 현대화 등을 연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농업교수를 역임한 후 귀국하여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한편 새옹지마가 될 일이었는지, 쌍용양회가 생산하는 시멘트 재고가 쌓여서 회사가 휘청거리게 되자 정부가 이 시멘트를 모조리 사들인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마침 세워졌던 새마을 계획과 결합되면서, 전국에 한 마을당 600포씩 뿌리는 식으로 재고를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4] 당시 거의 전국의 초가집을 헐고 시멘트집을 짓는데 만약 이걸 다 새로 생산했으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만들 노동력이나 자금 면에서 손실이 컸을 것이 뻔하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의는 논자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기획적 사회변동계획과 마찬가지로 새마을운동도 발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변화과정을 거쳤다.
첫째 범주의 정의는 한국고유의 농촌통합개발의 성공적인 유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농촌지역을 획기적으로 개발하면서 발의되었기 때문인데, 오늘날 이른바 농촌새마을운동이라고 구별되고 있다. 그런데 국제적으로는 여전히 새마을운동이 통합농촌개발유형, 즉 농촌새마을운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둘째 범주의 정의는 새마을운동이 도시지역에도 확대되어 이른바 도시새마을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새마을운동을 지역사회개발적인 기본 틀에서 총체적인 국가발전을 위한 범국민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 범주의 정의는 새마을운동이 범국가적인 지역사회개발의 본질을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기본철학이나 접근·집행 방법 등은 지역사회개발사업의 그것에 직결되어 있으며 농촌·도시를 총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새마을운동은 논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된다. 특히, 새마을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전문가집단 사이에도 정의에 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새마을운동은 어느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경험 또는 실천에 의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새마을운동은 정부의 절대적 지원으로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단순한 농촌개발사업을 넘어 공장·도시·직장 등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운동으로 확대·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새마을운동(─運動))]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살아보자는 운동으로, 농촌경제 발전과 농가소득 향상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공업 중심의 경제개발로 농업의 중요도가 낮아져 도시와 농촌간 소득격차가 많이 벌어지자 농촌문제가 사회문제가 되었고, 집권당의 전통적 정치기반을 흔들 수 있는 정치적 불안요소도 되었는데, 이에 대한 대책으로 추진한 것이 농촌의 새마을운동이다. 1969년의 3선개헌, 1971년의 대통령선거와 비상사태선포, 그리고 1972년의 유신헌법 통과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진행되었으며 새마을운동의 본격적 전개가 유신체제와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1970년 4월 대통령 박정희가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를 언급하며 국가정책 차원의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0~71년, 정부는 전국 33,267개 마을에 시멘트 336포를 무상지원하고 마을 길 확장, 공동빨래터 및 우물 설치 등 마을공동사업을 실시하였다. 이후 성과가 우수한 16,600개 마을에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지급하였다. 1971년 새마을정신을 근면·자조·협동으로 정하였고, 1972년 새마을가꾸기 사업이라는 하나의 사업에서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장하여 새마을운동을 본격 전개하였다.
1972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를 설립하였고, 1973년 이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官)과 민(民)을 연결하는 조직을 구성하였다.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지방국에는 새마을지도과, 새마을 담당관 및 계획분석관을 두었다. 1972년 마을별로 새마을지도자를 위촉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중심적 역할을 맡겼다. 농촌에서 성과가 나타나자 1974년부터 공장새마을운동을, 1976년부터 지역·학교·직장에 거점을 둔 도시새마을운동을 전개하며 사회 전체의 운동으로 확대·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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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희망님의 댓글
- 익명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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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새벽마다 청소하러 나오라고해서..
소시적엔 좋지 못한 기억이 있습니다